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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경호실의 그때 그사람들2013-11-22

경호실의 그때 그사람들

 

 

매일경제 기사입력 2013.11.22 16:15:31 | 최종수정 2013.11.22 16:29:45

 

최근 MBN이 대통령 경호 관련 특집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12월 1일이 경호실 창설 50주년이다. 필자는 대통령 경호실과 비서실에서 모두 근무한 경력이 있다. 초급 통역장교였던 1977년 1월 국방부에서 경호실로 파견돼 1978년 6월 전역 때까지 정보처에서 번역을 했고, 6공 시절 비서실에서 공보비서관으로 영어 불어 통역도 했다.
고 육영수 여사 서거 후 2년이 지난 1977년에도 경호실에는 아직 "우리는 죄인"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차지철 경호실장이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군인 신분인 필자가 느끼기에도 경호실 내 분위기는 무시무시했다.
아침마다 출근하면 처별로 조회를 하는데 애국가에 이어 `충정가`라는 경호원의 노래를 합창했다. 당시 알 만한 작곡ㆍ작사가가 만든 군가풍으로 각각 5ㆍ16, 새마을운동, 유신을 주제로 한 3절을 모두 불렀다.
"이 한 목숨 끓는 피, 충정으로 바칩니다"라는 후렴은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마음을 대변했다. 분위기가 얼마나 경직됐던지 청와대 청소 직원이 새벽 산책을 나온 대통령을 보고 인사는커녕 반대편 벽을 보고 얼어붙은 듯 돌아 서 있는 일이 벌어져 경호실장이 전 직원에게 `각하 조우 시 행동요령`이라는 지휘서신을 내려 보냈다.
우리 정보처 직원들이 사격훈련을 받고 사무실로 돌아오다가 대오를 맞추지 않은 것이 마침 차지철 실장의 눈에 띄어 그의 집무실 옆 회의실로 불려가 욕이 섞인 훈시를 듣기도 했다. 그때 필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차 실장의 무서운 시선과 음성을 체험했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경복궁 북쪽의 연병장에서 경호실장이 주재하는 국기 하강식이 열렸는데 청와대를 지키는 작전부대의 장병과 탱크를 포함한 무기들이 참가했고, 경호원들은 우측 계단에 도열했다. 시간이 되면 차 실장이 자신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초대한 정ㆍ재계 인사와 함께 지휘봉을 들고 입장하는데 대규모 군악대의 우렁찬 연주는 사람의 마음을 섬뜩하게 했다. 그 행사를 단상 아래에서 칼을 들고 지휘하던 경호실 작전차장보가 바로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 장군으로 이어졌다. 경호실 직원들은 번호를 붙여 지급된 감색 넥타이를 `오늘은 몇 번` 식으로 통일되게 매고 나와야 했다.
그 와중에 `큰 영애`로 불렸던 박근혜 대통령의 권유로 경호실ㆍ처 대항 배드민턴 대회가 열려 그나마 긴장이 잠시 풀어지곤 했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 6공화국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돌아온 청와대는 훨씬 더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필자는 다시 경호원들과 국내외에서 각종 행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통역이란 수행 경호원보다 더 가까이에서 대통령을 보필해야 하는 직무다. 경호원들은 통역을 맡은 필자를 더 빨리, 더 가까이 대통령 쪽으로 붙이기 위해 애썼다. 그들과 함께하며 필자는 "경호원들은 대통령을 경호하며 차라리 자신이 대통령 대신 공격받는 것을 최고 영광으로 생각할 사람들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경호란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 피경호자가 무사하면 임무가 끝나는 일이기 때문인데 그만큼 더 끝이 없는 일이기도 하다. "총소리가 나면 경호는 끝난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 총소리가 나지 않게 모든 가능한 예방조치를 다해야 하는 어려운 직종이다. 경호실 창설 50주년을 맞아 최초 여성 대통령을 모시게 된 경호원들, 특히 더 강화되었을 여성 경호원들의 건승을 기원한다.

 

[곽중철 한국외대 교수·한국통번역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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